KTX에 몸을 싣고 떠난 2시간의 일탈 강릉에서 맛본 바다와 커피의 위로

매일 반복되는 출근길 지하철과 회색 빌딩 숲에 지쳐가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예전 같으면 주말에 차 막힐 걱정부터 하며 포기했겠지만, 지금은 시대가 좋아졌다. 나는 충동적으로 서울역으로 향했고, 강릉행 KTX 티켓을 끊었다. 딱 2시간. 영화 한 편 볼 시간이면 동해 바다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터널을 지나 창밖 풍경이 산에서 들로, 들에서 바다로 바뀌는 순간 내 마음속 묵은 체증도 함께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강릉역에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공기는 서울과는 확연히 달랐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섞인 찬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초당 순두부 마을이었다. 평일인데도 유명한 맛집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평소라면 기다리는 걸 질색했겠지만, 여행지에서의 기다림은 왠지 모를 설렘으로 다가왔다. 30분을 기다려 받은 짬뽕 순두부 한 그릇. 새빨간 국물 위로 몽글몽글한 순두부가 하얗게 피어올라 있었다.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자 불향 가득한 매운맛이 입안을 강타했고, 뒤이어 부드러운 두부가 속을 달래주었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게 아니라, 지난 한 주 동안 쌓인 회사 스트레스를 땀으로 배출해 내는 듯한 개운함이었다. 밥 한 공기를 뚝딱 말고 국물까지 싹 비우고 나니, 비로소 내가 여행을 왔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향한 곳은 안목해변 카페거리였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커피 볶는 고소한 냄새와 바다의 비릿한 향기가 오묘하게 섞여 콧속으로 들어왔다. 통유리로 된 카페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눈앞에 펼쳐진 동해 바다는 서해와는 다른 깊고 진한 푸른색이었다. 하얀 파도가 모래사장을 집어삼킬 듯 밀려왔다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따뜻한 핸드 드립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아무 생각 없이 파도만 바라보는 일명 물멍의 시간을 가졌다.

이어폰도 끼지 않았다. 카페 안의 낮은 재즈 음악 소리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 그리고 창밖 너머 희미하게 들리는 파도 소리가 완벽한 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커피 맛은 훌륭했다. 하지만 사실 그 맛은 원두의 품질 때문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눈앞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내가 사무실 책상이 아니라 이곳에 앉아 있다는 해방감이 커피 맛을 완성시킨 최고의 설탕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마지막 코스로 중앙시장을 찾았다. 시장은 그 도시의 활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입구에서부터 고소한 기름 냄새와 달콤한 닭강정 양념 냄새가 진동했다. 호떡 하나를 사 들고 시장 골목을 누볐다. 닭강정 박스를 양손 가득 든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아 보였다. 나도 집에 있는 가족 생각이 나서 닭강정 반 마리와 오징어 순대를 포장했다. 갓 튀겨낸 어묵 고로케를 한 입 베어 물며 시장 통을 걸으니,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느껴져 마음이 따뜻해졌다. 세련된 백화점 푸드코트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투박하고 정겨운 에너지였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 창밖은 이미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아침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아침 9시에 출발해서 저녁 9시에 돌아오는 짧은 당일치기 일정이었지만, 체감상으로는 2박 3일 푹 쉬다 온 것처럼 충만했다. 캐리어를 끌 필요도, 숙소를 예약할 필요도 없이 가벼운 배낭 하나 메고 훌쩍 떠났던 하루.

우리는 가끔 거창한 휴가를 꿈꾸며 여행을 미루곤 한다. 하지만 진정한 휴식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KTX 티켓 한 장이면 언제든 닿을 수 있는 곳에 바다가 있고, 맛있는 순두부가 있고, 향긋한 커피가 있었다. 서울역에 도착해 다시 지하철을 타러 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내일 다시 전쟁 같은 일상이 시작되겠지만, 오늘 마신 바다의 기운으로 또 며칠은 거뜬히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혹시 지금 답답한 일상에 갇혀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면, 고민하지 말고 강릉행 기차표를 예매해 보길 바란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긴 휴가가 아니라, 어쩌면 바다를 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 딱 그만큼일지도 모르니까.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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