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무렵의 나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절약이라고 믿었다. 항공권은 무조건 경유를 해서라도 최저가를 찾았고, 숙소는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 자는 8인실 도미토리가 당연했다. 식사는 편의점 샌드위치나 길거리 음식으로 때우면서 아낀 돈으로 여행을 하루라도 더 길게 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에게 여행이란 최대한 적은 돈으로 최대한 많은 것을 보는, 일종의 미션 수행과도 같았다.
유럽 배낭여행을 갔을 때가 절정이었다. 교통비 2유로를 아끼겠다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1시간을 걸었다. 땀범벅이 되어 에펠탑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웅장한 철탑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보다는 다리가 너무 아파서 빨리 앉을 곳을 찾기에 급급했다. 밤에는 코를 고는 외국인 친구들 틈에서 쪽잠을 자느라 늘 피곤에 절어 있었다. 분명 눈앞에는 꿈에 그리던 풍경이 있는데, 내 몸은 제발 숙소에 가서 눕고 싶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돌아와서 남은 건 수천 장의 인증 사진과 발바닥의 물집, 그리고 며칠을 앓아눕게 만든 몸살이었다. 그때는 그게 젊음의 특권이고 낭만인 줄 알았다. 고생한 만큼 기억에 남는다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말이다.
시간이 흘러 직장인이 되고, 통장에 조금의 여유가 생겼을 때 처음으로 소위 말하는 돈 지랄 여행을 떠나봤다. 동남아의 프라이빗 풀빌라를 예약하고, 저가 항공 대신 국적기를 탔다. 공항에서부터 픽업 서비스가 나왔고, 무거운 캐리어를 들어주는 직원의 친절한 미소를 받으며 에어컨 빵빵한 차에 탔을 때 나는 처음으로 자본주의의 달콤한 맛을 봤다.
숙소에 도착해 방문을 여는 순간 펼쳐진 풍경은 충격적이었다. 나만을 위한 수영장, 푹신한 침구, 원하는 시간에 가져다주는 룸서비스. 나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렸다. 예전 같으면 본전 뽑아야 한다며 새벽부터 일어나 관광지를 돌았겠지만, 그 여행에서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고 수영장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책을 읽었다. 신기하게도 몸이 편안하니 풍경이 더 깊이 들어왔다. 야자수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노을이 지면서 변하는 하늘의 색깔 같은 디테일한 아름다움이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깨달았다. 돈으로 산 건 단순히 비싼 침대와 맛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나는 돈으로 시간과 체력, 그리고 마음의 여유를 샀던 것이다. 가성비 여행에서 돈을 아끼는 대신 내 체력을 지불했다면, 프리미엄 여행에서는 돈을 지불하고 온전한 나의 컨디션을 지켜낸 셈이었다. 좋은 컨디션으로 마주한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답고 다정했다. 여행의 질이 달라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비싼 여행이 정답이라는 건 아니다. 최저가 여행이 주는 날것의 매력은 분명히 있다. 버스를 잘못 타서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골목길의 아름다움, 호스텔 로비에서 만난 낯선 여행자와 맥주 한 캔을 나누며 나누던 깊은 대화, 돈이 없어서 빵 한 조각을 나눠 먹으며 느꼈던 끈끈한 전우애 같은 것들. 이런 예측 불가능한 낭만은 5성급 호텔의 완벽하게 세팅된 서비스 안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보석 같은 순간들이다.
반면 프리미엄 여행은 실패 없는 만족을 준다. 하지만 가끔은 그 완벽함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모든 게 돈으로 해결되니 내가 직접 부딪히며 얻는 성취감이나 잊지 못할 에피소드는 확실히 적다. 다녀오면 몸은 개운한데, 술자리 안주로 삼을만한 무용담은 별로 없는 여행이 되곤 한다.
결국 여행의 비용 분석은 엑셀 파일에 적힌 숫자로 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아는 것이 핵심이다. 낯선 세상과 부딪히며 내 한계를 시험하고 날것의 경험을 채우고 싶다면 배낭을 메고 가장 싼 티켓을 끊어야 한다. 반대로 일상에 지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고 오로지 위로와 휴식이 필요하다면, 통장 잔고가 허락하는 한 가장 비싼 숙소를 예약하는 게 맞다.
이제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 가격 비교 사이트보다 내 마음의 상태를 먼저 살핀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무엇을 얻고 싶은가. 모험인가, 휴식인가. 그 목적에 따라 예산을 배분한다. 때로는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오로지 미술관 입장료에 올인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것도 안 하고 바다만 보이는 비싼 호텔 방에 전 재산을 털어 넣기도 한다.
돈을 아끼는 여행도, 돈을 쓰는 여행도 모두 나름의 가치가 있다. 중요한 건 남들이 말하는 가성비나 럭셔리라는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여행 계산서를 쓸 줄 아는 지혜가 아닐까. 10만 원을 쓰든 100만 원을 쓰든, 돌아오는 길에 내 마음이 행복으로 꽉 찼다면 그 여행은 무조건 남는 장사니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