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터카 키를 내려놓고 두 발로 걸었던 제주 2박 3일 차창 밖이 아닌 진짜 제주를 만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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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행이라고 하면 으레 렌터카부터 예약하는 게 순서였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셔틀버스를 타고 렌터카 하우스로 이동해 차를 인수받고, 해안 도로를 엑셀 밟으며 달리는 것. 그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제주 여행법이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조금 다르게 보내고 싶었다. 운전석에 앉아 앞만 보고 달리는 대신, 내 두 발로 땅을 딛고 제주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렌터카 예약 앱을 끄고 운동화 끈을 조여 맸다. 무모하다면 무모했던 나의 2박 3일 뚜벅이 도보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제주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늘 트렁크에 던져 넣던 배낭을 메고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낯설고 설렜다. 내가 선택한 코스는 제주의 서쪽, 올레길 코스를 따라 걷는 것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처음 마주한 제주의 길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요하고 다정했다. 차를 타고 쌩하니 지나갈 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었던 현무암 돌담들이 걸으면서 보니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이었다. 구멍 숭숭 뚫린 돌 틈 사이로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있었고, 낮은 지붕 위에는 호박 넝쿨이 게으르게 널려 있었다. 걷지 않았더라면 평생 모르고 지나쳤을 소소한 아름다움이었다.
물론 낭만만 있었던 건 아니다. 제주의 바람은 생각보다 거세서 모자가 날아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햇볕은 따가웠다. 평소 걷기 운동이라곤 숨 쉬기 운동밖에 안 하던 저질 체력 탓에 한 시간을 걷자 종아리가 땡겨왔다. 지나가는 빈 택시를 볼 때마다 저걸 잡아타 말아 하는 유혹이 수십 번씩 찾아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를 붙잡아준 건 올레길의 이정표인 파란 리본이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는 그 리본이 마치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걷기 여행의 묘미는 길 위에서 만나는 우연한 선물들에 있었다. 한참을 걷다 목이 말라 들어간 허름한 구멍가게. 거기서 할머니가 냉장고 깊숙한 곳에서 꺼내주신 얼음물 한 병은 세상 그 어떤 고급 호텔의 웰컴 드링크보다 시원했다. 땀을 식히며 평상에 앉아 있는데, 할머니가 귤 두 개를 손에 쥐여주셨다. 못생긴 귤이었지만 입에 넣으니 새콤달콤한 과즙이 터져 나왔다. 렌터카를 타고 맛집만 찾아다녔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투박하지만 따뜻한 제주의 정이었다.
점심때는 지도 앱을 끄고 그냥 냄새가 좋은 식당에 들어갔다. 간판도 낡은 작은 식당에서 보말 칼국수 한 그릇을 시켰다. 다리는 뻐근하고 배는 고픈 상태에서 먹는 뜨끈한 국물 맛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국물 한 방울까지 싹 비우고 나니 다시 걸을 힘이 생겼다. 차를 타고 다닐 땐 소화도 시킬 겸 억지로 걸었는데, 걸어 다니니 밥맛이 꿀맛이라는 말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이튿날은 해안 도로를 따라 걸었다. 파도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차 안에서 창문을 닫고 에어컨 바람을 쐬며 보는 바다와, 짠 내 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보는 바다는 차원이 달랐다. 바다 색깔이 이렇게나 다양한지 처음 알았다. 에메랄드빛이었다가 짙은 남색이었다가, 햇빛을 받으면 은색으로 부서지는 윤슬까지. 걷다가 힘들면 아무 방파제에나 걸터앉아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간에 쫓길 필요가 없으니 파도가 치는 모습만 30분을 넘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내 안의 복잡했던 생각들이 파도에 쓸려나가는 기분이었다.
물론 불편함도 있었다. 버스 배차 간격이 길어서 한 시간을 길바닥에서 기다리기도 했고, 무거운 짐 때문에 어깨에 멍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오히려 여행을 기억에 남게 만들었다. 편하게 이동했다면 기억나지 않았을 정류장의 풍경, 버스를 기다리며 만난 동네 강아지,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았을 때의 그 해방감 같은 것들 말이다.
여행 마지막 날, 공항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는데 기분이 묘했다. 2박 3일 동안 내 발자국을 남긴 길들이 스쳐 지나갔다. 차로 1시간이면 갈 거리를 이틀에 걸쳐 걸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그 느린 속도 덕분에 제주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와 다시 바쁜 일상에 치여 살고 있지만, 가끔 힘들 때면 그때 걸었던 제주의 돌담길을 떠올린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 잠시 멈춰서 뒤를 돌아보면 보였던 그 평화로운 풍경들.
누군가 제주 여행을 간다고 하면 나는 이제 자신 있게 추천한다. 하루쯤은 차를 빌리지 말고 걸어보라고.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최단 거리가 아니라, 내 두 발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걸어보라고. 조금 느리고 조금 힘들지 몰라도, 차창 밖 풍경이 아닌 땀 냄새와 바다 냄새가 섞인 진짜 제주를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다음번 제주 여행에서도 나는 아마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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