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준비를 할 때 숙소는 나에게 늘 계륵 같은 존재였다. 밖에서 돌아다니느라 바쁜데 굳이 비싼 돈을 주고 잠만 자는 곳에 투자해야 하나 싶었다. 그래서 늘 위치 좋고 가격 싼, 소위 가성비 숙소만 찾아다녔다. 침대에 눕기만 하면 기절하듯 잠드는 게 여행이라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몇 번의 여행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좋은 숙소는 단순히 몸을 누이는 공간이 아니라, 그 자체가 여행의 목적지가 되기도 하고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치유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오늘은 내 여행의 기준을 완전히 바꿔놓았던, 시설의 화려함보다 공간이 주는 울림이 더 컸던 잊지 못할 숙소 세 곳의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첫 번째 기억은 스위스 여행에서 묵었던 산장 호텔이다. 평소라면 절대 예약하지 않았을 비싼 가격이었지만, 신혼여행이라는 핑계로 큰맘 먹고 아이거 북벽이 정면으로 보이는 방을 예약했다. 체크인하고 방문을 여는 순간, 나는 배낭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창문 밖으로 그림엽서에서나 보던 거대한 설산이 쏟아질 듯 서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날 오후 일정을 전부 취소했다.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대신 테라스 의자에 앉아 시시각각 변하는 산의 색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해가 질 무렵 산봉우리가 황금빛으로 물드는 모습은 내가 밖에서 봤던 그 어떤 풍경보다 압도적이었다. 저녁에는 룸서비스 대신 테라스에서 컵라면을 끓여 먹었는데, 차가운 알프스 공기를 맞으며 먹는 그 라면 맛은 미슐랭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보다 훌륭했다. 비싼 숙박비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돈으로 산 건 하룻밤의 잠자리가 아니라, 평생 잊지 못할 내 인생 최고의 저녁 식사와 아침 풍경이었으니까. 숙소 하나가 여행의 질을 이토록 극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두 번째는 정반대의 매력을 가진 곳이다. 제주도의 한 조용한 마을에 있는 오래된 돌집 민박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시설은 불편했다. 화장실은 좁았고, 웃풍이 있어서 잘 때 코가 시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5성급 호텔이 절대 줄 수 없는 따뜻함이 있었다. 아침마다 주인 할머니가 직접 텃밭에서 딴 채소로 차려주시는 투박한 조식이 그랬다.
낯선 여행자와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할머니는 마치 시골집에 놀러 온 손주를 대하듯 밥을 꾹꾹 눌러 담아주셨고, 밤에는 귤을 까주며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삐걱거리는 나무 마룻바닥 소리조차 정겨운 배경음악처럼 느껴졌다. 며칠 묵지 않았는데 떠날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화려한 어메니티나 푹신한 침대는 없었지만, 그곳에는 사람의 온기가 있었다. 여행지에서 낯선 이에게 받는 위로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불편함조차 감성이 되는 마법을 경험한 곳이었다.
마지막은 일본 교토 외곽에 있던 작은 료칸이다. 이곳의 특징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방에는 TV도 없었고, 와이파이도 잘 터지지 않았다. 처음엔 스마트폰을 할 수 없어서 불안하고 심심해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강제로 디지털 디톡스가 되자 비로소 다른 감각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들리는 대나무 숲의 바람 소리, 다다미방 특유의 마른 풀 냄새, 그리고 따뜻한 차를 내릴 때 나는 물 끓는 소리. 그동안 내가 얼마나 시끄러운 소음 속에 살았는지 깨달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창밖만 바라보는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잡념들이 사라지고 마음이 투명해지는 기분이었다.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며 생각했다. 진정한 휴식이란 무언가를 더 채우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는 과정이구나. 그 고요했던 하룻밤은 바쁜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도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순간 중 하나다.
이 세 곳의 숙소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 하나는 럭셔리했고, 하나는 낡고 소박했으며, 하나는 고립된 곳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준 감동의 크기는 같았다. 단순히 잠을 자는 곳을 넘어, 나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고 위로를 건넸던 공간들.
이제 나는 여행을 준비할 때 관광지보다 숙소를 먼저 검색한다. 이번엔 어떤 공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곳에선 어떤 아침을 맞이하게 될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혹시 지금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단순히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당신의 여행을 완성해 줄 특별한 공간을 찾아보길 바란다. 숙소 문을 여는 순간, 당신의 여행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